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리처드 1세 (문단 편집) === 사망 === 리모주는 아키텐의 북동쪽에 위치한 잉글랜드령과 프랑스 간의 중요한 국경 지대로 리처드의 형인 [[청년왕 헨리]] 시절부터 툭하면 반란을 일으킨 곳이었다. 당시 리모주 자작이 [[필리프 2세]]와 동맹을 맺고 리처드에게 반기를 들었는데 전략적 요충지라, 리처드 1세는 직접 출군했다. 또한 리모주의 영지에서 [[로마 제국]] 시절의 [[황금]]이 대량으로 발견되었는데, 리모주 자작이 이것을 리처드에게 넘겨주기를 거부해 리처드가 공격했다는 말이 널리 알려져 있다. 보물을 언급한 출처는 호버든의 연대기, 코제샬의 랄프의 연대기, 마르간의 연대기, 프랑스 궁정의 연대기들이 있고 특히 마르간의 연대기를 제외한 것들은 12세기 후반 역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문헌이다. 다음은 코제샬의 랄프가 라틴어로 쓴 잉글랜드 연대기인데, 보물이 나왔다는 말을 기록한다. 연대기에는 하단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리모주 자작은 필리프와 동맹을 맺고 반기를 들었는데, 리처드는 [[사순절]] 기간 필리프와 평화 조약을 맺은 기회를 이용해 군대를 이끌고 가서 공격했다. 게다가 몇몇 사람이 말하기를 막대한 양의 보물이 리모주 자작의 땅에서 발견되어, 이 보물을 넘기라고 했는데 자작이 거절해 더욱 화가 났다는 말도 있다. 마치 사순절 기간에는 무기를 놓아야 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인 양 리처드는 자작의 땅을 불과 칼로 황폐화시켰다. >---- > 존 길링엄(런던 정치 경제 대학 역사학 명예 교수), ''Richard I'', 323 리모주는 로마 제국 시절에도 별로 큰 도시도, 중요한 도시도 아니여서 왕이 군대를 끌고 갈 만큼 막대한 보물이 나왔다는 것을 반신반의하는 의견이 있다. 또한 막대한 보물의 존재를 액면 그대로 듣지 않고 리모주 수도사 베흐나의 기록 "잉글랜드 왕의 목적은 리모주 백작의 성과 마을의 파괴였다."에서 보물 언급이 없다는 점을 근거로 리모주가 전략적 요충지로서의 목적과 필리프가 개입한 권위 문제가 얽힌 전투로 파악하는 의견이 있다. 지도를 참고하면 당시 리모주 자작령은 중요한 곳이다.[* [[https://fr.wikipedia.org/wiki/Empire_Plantagen%C3%AAt#/media/File:France_1154-fr.svg|잉글랜드의 프랑스령]]] 당시 프랑스는 크게 [[파리(프랑스)|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북쪽 영토와 남쪽의 [[툴루즈]]로 양분되어 있었는데 그 사이를 잉글랜드령이 [[월경지|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이렇게 프랑스령을 반으로 쪼개는 잉글랜드령이 바로 리모주 자작령과 오베르뉴 백작령, 라 마르셰 백작령[* 현재의 크뢰즈주]이었다. 리모주 자작이 농성한 샬루-샤브롤 성을 공격한 리처드는 1199년 3월 25일 평상복 차림으로 성벽 가까이 거닐며 상황을 살피다가 성에서 날아온 석궁 화살에 왼쪽 어깨의 목 가까운 부위를 맞았다. 이는 큰 실책이었는데 전쟁 중에 성벽에는 저격수가 배치되는 터라 가까이 가는 것은 굉장히 위험하다. 그것도 갑옷을 입지도 않고 평상복 차림으로 갔으니 자살 행위인 것이다. 아픈 어깨를 감싸고 막사로 돌아온 리처드는 나무 화살을 부러뜨렸다. 그러나 화살촉은 이미 그의 어깨에 깊숙히 박힌 상태였다. 군의관은 수술을 하여 왕의 피부를 칼로 가르고 상처를 벌린 뒤 쇠붙이를 꺼내었다. 그렇지만 상처가 심하게 곪아 들어가 리처드는 1199년 4월 6일 세상을 떠났다.[* 전근대에는 [[항생제]]가 없다 보니 수술하고 나서 부작용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흔했다.] 리처드의 병사들은 성을 점령하는 데 성공하고 모든 수비병들을 [[교수형]]에 처했는데, 수비병 중 왕을 쏜 소년병 구르동(Gourdon)이 리처드 1세 앞에 끌려가게 되었다. 리처드가 구르동을 보고 "짐이 네게 무슨 짓을 했기에 짐을 죽이려 하였느냐?"라고 하자 이에 구르동이 지지 않고 마주 소리쳤다. "당신이 내게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나 묻는 겁니까? 당신이 내 아버지와 형제 둘을 죽였습니다. 이제 내 목도 매달겠죠. 그것도 실컷 고문한 다음에 말입니다. 뜻대로 하시오! 하지만 나를 아무리 고문해도 당신도 죽을 거요. 내 손으로 당신의 목숨을 끝장낸 것이오!" 리처드는 구르동의 당돌한 모습에 "젊은이, 자네를 용서하겠다. 몸 성히 가거라."라고 말한 뒤 족쇄를 풀고 100실링을 하사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구르동은 리처드의 부하 장군에게 산 채로 껍질이 벗겨진 다음에 교수형당해 죽었다. 유력자라 해도 죽은 자는 말이 없으므로 유언이 임의로 어겨지는 경우는 흔했고, 충성이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정치적 이해의 합치이므로 권력자를 죽인 것은 그 부하들에게 충분히 개인적인 원한을 사게 만든다. 또 그 장군은 주군이 구르동의 화살에 맞았을 때 자신이 직접 환부를 헤집으며 화살을 꺼내려 했을 정도로 충성심이 강했다고 한다. 물론 위생적 관점으로 보면 그게 화가 된 것이지만.]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hurch_of_Fontevraud_Abbey_Richard_I_effigy.jpg|width=100%]] || || 퐁트브로 수도원 무덤 조상 || >'''짐은 야심을 성전 기사단에게, 탐욕을 수도자들에게, 그리고 쾌락을 고위 성직자에게 맡기노라.''' >---- > 리처드 1세의 유언 사망 후에 그의 유해는 유언에 따라 분리되어 각기 다른 곳에 묻혔다. 머리는 샤루 수도원, 심장은 노르망디의 루앙, 유해는 퐁트브로 수도원. 각 지방이 인기 좋았던 왕의 유해를 모시길 원했고, 왕 사후에도 지배권이 있음을 보이려는 퍼포먼스 성격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